이 반란의 시작은 비였다. 서기 785년 1월 13일, 선덕여왕이 아닌 선덕왕이 승하한다. 늦은 나이에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결국 귀족들의 합의체인 화백회의에서 후계자를 지목해야만 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인 김주원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김주원이 살던 곳은 신라의 수도 북쪽 알천 너머였다. 지금의 북천인 알천은 때마침 발생한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 화백회의에 참석한 누군가가 주장한다.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상대등 김경신이었다. 그는 선덕왕이 상대등이었던 시절 함께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이찬 김지정을 진압하는 공로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렇게 신라의 서른 여덟 번째 임금인 원성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정월이라면 한 겨울인데 며칠 동안 알천을 건너지 못할 정도로 큰 홍수가 났다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어쨌든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다가 한순간에 밀려난 김주원은 금성을 떠나 지금의 강원도 강릉인 명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야심에 가득 찬 그의 둘째 아들 김헌창은 금성에 남는 것으로 결정한다.
금성에 남은 김헌창은 원성왕의 증손자인 애장왕에게 중용된다. 이찬의 관등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집사부의 수장인 시중으로 임명된다. 국가의 기밀 사무를 담당한 집사부는 지금으로 치면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합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왕인 헌덕왕 때 무진주 도독이 되었다가 다시 시중에 임명된다. 그리고 다시 청주를 거쳐 웅천주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웅천주 도독에 임명된 다음 해인 서기 822년 3월, 장안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무려 40여년 전 일이라 시간이 너무 지난 상태였다. 아마도 헌덕왕의 즉위 과정에서 자신에게 왕위가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다가 무산되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은 초반에 신라를 거의 둘로 나눌 정도로 엄청난 기세를 자랑했다. 당시 신라의 지방 통치체제는 9주 5소경이었다. 그런데 김헌창은 자신이 도독으로 있던 웅천주를 비롯해, 무진주와 완산주, 청주와 사벌주까지 손에 넣었고, 5소경 중에서 국원소경과 금관소경, 서원소경까지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대략 옛 백제의 영역과 거의 겹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무열왕계의 신라 왕족이 옛 백제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김헌창은 아예 장안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정했다. 그의 최종목표가 신라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일 수 도 있고, 아니면 옛 백제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을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반란 초기의 기세는 어마어마했고, 신라 왕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헌덕왕은 일단 수도인 금성의 방어를 튼튼하게 하고 진압군을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을 시작으로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이 뒤를 이었다. 뒤이어 이찬 김균정, 잡찬 김웅원, 대아찬 김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아마도 일길찬 장웅의 군대가 선봉부대였고, 이찬 김균정이 이끄는 부대가 본대로 보인다. 진압군은 도로를 점거하고 기다리고 있던 김헌창의 반란군과 전투를 벌인다. 도동현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투는 진압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웅은 여세를 몰아 위공과 제릉과 합세해서 난공불락의 요새인 삼년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속리산으로 진격한다. 이찬 김균정이 이끄는 본대 역시 오늘날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에서 반란군을 괴멸시킨다. 승리한 진압군은 속속 반란군의 근거지인 웅진성을 포위한다. 이곳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자 절망한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종자가 그의 목과 몸통을 따로 묻어서 숨기려고 했지만 진압군은 기어코 시신을 찾아내서 부관참시를 해버리고 그의 친척과 부하 239명도 함께 처형한다.
진압군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으로 한 때 신라를 뒤흔들었던 김헌창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를 이은 갈등이 결국은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김헌창은 진압을 명령한 헌덕왕을 증오했을지 아니면 바보처럼 왕위를 놓쳐서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아버지를 더 원망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김헌창의 난은 슬픈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김헌창의 반란이 막을 내린 지 3년 만인 서기 825년 정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의 도적 수신이 이끄는 100명의 무리와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지금의 서울에 해당되는 남평양을 근거지로 만들기 위해 봉기했지만, 북한산주의 도독 김총명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고 만다. 대를 이어 반란을 일으키는 근성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하지만 김헌창의 반란은 신라가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아울러, 백제가 사라진 지 16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라에 대한 불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불만은 75년 후인 서기 900년에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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