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나면 쉽게 버려지는 전자제품
최근 주요국 ‘수리할 권리’ 관심↑
韓, 순환경제법 시행…자율에 방점
“구체성·강제력 키워야 실질적 효과”
최근 세계는 급변하는 물결 속에 다양한 생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등 자연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 중립, 디지털 첨단 기술을 접목한 4차 산업혁명 등 저마다 시장 선점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부와 공공기관 역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 중입니다.
데일리안이 기획한 [D:로그인]은 정부와 공공기관 신사업을 조명하고 이를 통한 한국경제 선순환을 끌어내고자 마련했습니다.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 거치는 [로그인]처럼 정부·공공기관이 다시 한국경제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1986년 처음 전파를 탄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 속 순돌이 아빠의 직업은 전파사다. 전파사는 각종 전자제품을 판매하면서 동시에 수리도 하는 직업 또는 장소(가게)를 말한다. 그 시대 전파사는 전자제품뿐만 아니라 가구도 수리하고 때론 장난감도 고쳐줬다. 기술만 놓고 보면 ‘장인(匠人)’, ‘명인(名人)’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네마다 전파사 한두 곳은 꼭 있었다. 그 시절 전자제품은 가격은 비싼데 내구력은 약했다. 거금을 주고 산 제품이 고장 나면 당연히 고쳐 써야 했다.
시대가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품 가격이 내려가고, 만든 회사에서 사후 서비스(AS)까지 책임지면서 전파사는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개인의 ‘재주’만으론 수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자제품이 복잡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전파사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곱씹어 볼 점은 그 직업이 갖는 의미다. 전파사는 부러지고 고장이나 사용할 수 없는 제품을 수리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했다. 버려지게 될 제품이 그들의 손끝에서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고쳐 쓰는 데 인색해졌다. 노트북, TV, 냉장고 등 고가 제품은 고장 났을 때는 그나마 AS센터를 찾지만, 몇만원짜리 제품은 쉽게 폐기물이 된다. 고쳐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가 됐다.
고쳐 쓰지 않는 행태는 불필요한 지출과 함께 자원 낭비, 환경 오염으로 이어진다.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도 따른다. 이 때문에 수년 전부터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수리해서 쓸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는 ‘수리협회(The Repair Association)’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2013년 설립한 이 단체는 미국 최대 규모 ‘수리권’ 옹호 단체다.
이들은 전자제품 제조업체가 자사 제품 수리에 필요한 부품, 수리 방법 등을 AS센터 외 일반 소비자와 사설 수리업체에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하면 해당 제품의 소유권을 가지므로 제품 수리도 자유로운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수리협회는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수리할 권리의 가장 큰 적은 새 제품을 더 많이 팔려는 기업들”이라고 강조한다. 고장 난 제품을 고쳐쓰기보다 새 제품을 사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업들의 꼼수라는 의미다.
수리협회 주장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25개 미국 기업이 수리권 반대 로비에 지출한 금액은 1억 3600만 달러(약1820억원)에 달한다. 그만큼 미국 주요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해당 수리할 권리에 반대하고 있다는 게 수리협회 판단이다.
기업이 수리권을 반대하는 표면적 이유는 ‘아무나 수리를 하면 기업의 지식재산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 유출이나 보완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수리협회는 “이용자가 자기 데이터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기를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것”이라며 “오히려 직접 수리할 권리를 주는 게 데이터를 확실히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반박한다.
수리협회 지적에 수리권 보장을 논의하는 미국 주정부가 늘고 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미네소타주는 전자기기에 대한 수리권 보장법을 지난해부터 시행 중이다. 콜로라도 역시 2023년 휠체어를 시작으로 지난해 농업용 장비의 수리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시행했다.
이 밖에도 캐나다와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등에서 수리권 보장법이 입법화됐거나 입법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 자율적 이행으로는 한계…강제 규정 필요
한국도 수리권 보장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우선 지난 2022년 12월 28일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하 순환경제법)’이 국회를 통과해 지난해 1월 1일부터 본격 시행에 나섰다.
순환경제법은 기존 ‘자원순환기본법’을 전면 개정한 것이다. 순환경제법은 생산과 유통, 소비, 재활용 전 주기의 순환 체계 구축을 위한 단계별 제도적 기반을 담고 있다.
순환경제법은 구체적으로 자원의 효율적인 이용을 통하여 자원의 낭비를 최대한 억제하도록 한다. 특히 내구성이 우수한 제품의 생산과 제품 수리 등을 통해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폐기물의 발생을 최소화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리가 쉽도록 제품을 설계·생산하는 내용을 의무로 부여했다.
소비자는 수리 방식과 업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수리에 필요한 예비 부품을 확보해야 한다. 예비 부품 배송 기한과 그밖에 제품 수리에 필요한 사항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이 밖에도 소비자가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고, 수리 서비스 관련 정보를 소비자가 쉽게 접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환경부는 “순환경제란 대량으로 자원을 생산·소비·폐기해 온 것과 달리 생산과 유통, 소비, 재사용, 재활용 모든 과정에서 자원 사용과 폐기물 발생을 원천적으로 줄이고 사용한 자원을 경제 체계 안에서 계속 이용하는 지속가능한 경제 체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현재 순환경제법은 완전한 수리권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순환경제법은 시행령에서 수리권 적용 대상과 부품 보유기간을 정하도록 했는데, 이는 소비자와 기업 간 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일 뿐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준은 아니라는 게 환경단체 지적이다.
서울환경연합은 지난해 논평을 통해 “현재 기준이 제품 수명 연장을 통해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상과 부품 보유기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보다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안 자체가 강제 규정보다는 기업의 자율적 이행에 맡기고 있는 대목이 많아 법인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
기업에 대한 지원과 규제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홍수열 자원순환경제연구소장은 지난 2월 ‘순환경제 스타트업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의 과제들’ 토론회에서 “순환경제는 장기적인 산업 전환이 필요한 분야인데, 한국의 규제는 일관성이 부족해 신뢰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서울환경연합은 “지금 수리할 권리는 한정된 자원을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선순환할 수 있는 순환 경제의 핵심 개념”이라며 “단순히 허울뿐인 법안을 넘어 원래 법안의 취지인 한정된 자원을 선순환할 수 있도록, 수리가 일상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