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할리우드 미투 운동 이후 등장
2017년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배우의 동의 없이 이뤄진 불편한 촬영 관행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성적 연기나 노출 장면에서 배우가 보호받지 못한 채 감정 연기를 강요당했던 현장의 구조는 더 이상 정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후 미국배우조합(SAG-AFTRA)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 제도를 도입했고, HBO는 글로벌 플랫폼 회사 중 가장 먼저 이를 채택, 2018년부터 모든 작품의 성적 장면에 이들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연출자도 배우도 아닌 제3자의 위치에서, 장면의 흐름과 배우의 안전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는다. ‘인티머시’(intimacy)란 단어 그대로, 성적 표현뿐 아니라 출산, 신체적 고통, 폭력, 감정적 밀접함이 요구되는 장면 등 다양한 형태의 ‘친밀한 접촉’을 조율한다.
이들은 배우의 동의 범위를 사전에 명확히 설정하고, 동선과 신체 접촉의 수위, 감정적 준비 상태를 점검한다. 필요시 촬영 중단을 요청할 권한도 있다. 단순히 장면을 연출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배우가 말하기 어려운 요구를 대신 전달하고, 심리적 외상을 방지하는 정서적 보호막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필수 인력으로 인정하고 관련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넷플릭스, 애플TV, HBO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이미 다수의 작품에 이들을 투입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투입 시킨 곳은 HBO로, 1970년대 포르노 산업을 다룬 드라마 '더 듀스'의 촬영 과정 사례는 상징적이다. 촬영 당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배우 엘리샤 로디스의 무릎 보호를 위해 패드를 준비하고, 테이크마다 스프레이와 윤활제를 제공하며 배우가 장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2020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참여했다. 1800년대 영국 런던 사교계를 배경으로 브리저튼 가문의 딸 다프네와 공작 사이’ 사이의 계약 연애를 다룬 ‘청소년 관람불가’ 로맨스물로, 두 캐릭터의 관계가 육체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한 만큼, 베드신의 강도가 높았다.
넷플릭스의 '라이드 오어 다이'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동성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여성이 도피 중 다시 연인과 재회하게 되는 이야기로, 육체적 친밀함과 감정적 불안을 함께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 만큼,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현장에 상주해 배우들을 도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제도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괴물' 촬영 당시 LGBTQ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청소년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성장 정체성과 신체 접촉을 둘러싼 감정선에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촬영에 투입했다. 이들은 배우의 나이, 성별 정체성, 연기 경험을 고려해 연출자와 배우가 직접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접촉의 경계를 조율했고, 결과적으로 민감한 장면들을 문제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괴물' 개봉 내한 인터뷰 당시, 일본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단 두 명뿐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영화계를 위해 더 많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는 아직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다. 공식 자격을 갖춘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참여한 국내 첫 사례는 2023년 한국영화아카데미 단편 ‘갈비뼈’다. 노출 연기를 앞둔 배우 권잎새를 위해 일본인 코디네이터 니시야마 모모코가 현장에 함께했다.
권잎새는 당시를 회상하며 노출 연기와 관련해서 불편하더라도 배우는 오히려 말을 아끼게 되는 현실을 언급했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존재가 연기자에게 필요한 결정권을 되찾아 주는 장치였다고 밝혔다.
봉준호 감독 또한 워너브러더스와 작업한 '미키17'을 언급하며, "감독과 배우 사이를 조율해 주는 현장의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변화의 조짐은 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국내 최초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주제로 한 공식 포럼이 열렸고,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국내 1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권보람과 공식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정착을 위한 발걸음을 뗐다.
권보람은 미국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전문 기관에서 정식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을 갖춘 인물로, 한국 제작 현장에 투입될 준비를 마친 첫 사례다. 다만 아직 실제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 참여한 경력은 없다.
권보람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이런 직업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이 일을 시작하고 국내에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왜 아직 투입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아직 직업의 존재 자체를 모르니 못 쓰는 것이다. 무지 때문에 투입이 안된 거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중요한 숙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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